어두운 밤길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은 곳에 어슴프레 보이는 형체, 불빛이 꺼진 방 안에 혼자 누워 벽면이나 모퉁이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귀신이든 유령이든 실체가 모호한 건 늘 두렵다. 하지만 가장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 시선에 더하는 나의 '상상'이다.
나는 유년 시절, 악몽을 자주 꿨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늙은 마녀들이 고깔모자를 쓰고 하늘을 날아 나를 쫓거나, 형태가 모호한 잼 덩어리 같은 괴물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선 날 에워싸기도 했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얼굴 없는 사람들이 검은 빌딩 틈새로 나를 벼랑 끝으로 몰기도 했다. 하지만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 귀신 등 우리가 귀신을 떠올릴 때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을 꿈에서 본 일이 없었다. 왜 나는 '한국형 귀신'을 볼 수 없었을까. 개인적인 생각에 어린 시절 영상으로 보아왔던 이미지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또래 세대(80년대 출생)는 주말의 명화 속 영화들 - '죽어야 사는 여자', '고스트 바스터즈', '프레디'나 '13일 밤의 금요일', '그렘린', '구니스' 등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괴물이나 유령의 형상이 자아가 형성될 무렵부터 머릿 속에 주입되었던 탓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지난 2013년 5월 경,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프랑스 젊은 작가전 : 프랑스 유령의 집' 전시를 보러 간 일이 있었다. 네일 벨루파, 줄리 베나 등 총 12명의 작가들의 미술작품을 선보인 전시였다. 긴장을 유발하는 청각적 장치와 함께 서로 상호작용하는 작품들이 모인 복층 공간은 하나의 '유령저택'을 연상케 했다. 전시를 본 후 송은아트스페이스 측 담당자 권유로 프랑스 문화원 원장 다니엘 올리비에와 큐레이터 가엘 사르보 그리고 네일 벨루파와 플로랑스 뤼카 등 작가들 틈에 섞여 식사를 가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다니엘 올리비에 원장은 한국과 프랑스의 '유령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얘길 내게 들려주었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형태의 유령이 프랑스에선 그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는 내게 물었다. "Que vous en semble fantôme?(유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프랑스는 이상하리만치 유령 이야기가 많지 않다. 괴담이나 유령도시, 유령의 집 등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만 아시아처럼 구체적인 유령에 대한 형상은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 속 캐릭터는 구체적인 인상을 제공하지만 사실상 유령이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19세기 초반에 쓰여진 이 소설은 당시 초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이 컸던 시대배경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망령이나 유령을 뜻하는 프랑스어 fantôme에는 그밖에 허울이나 허구, 환각, 추억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지인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와 중국,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인 스터디 그룹에서 각각 자국의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유령(fantôme)은 오래된 성에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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