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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월 00일을 기록

흑백 다방 그리고 서른



이제 서른이다. 한국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일 년을 더해 먹는다고, 실 나이야 아직 꽉 차진 못했다지만 그래도 서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진해 흑백 다방이 계속 생각난다. 내 스무 살의 삶을 꾹꾹 눌러 담았던 그곳이 내 시작이었고, 배움터였고, 선생님이었다. 
유택렬 화백의 딸 경아 누나는 흑백다방을 지키려 유학 중 학업을 파하고 돌아와 베토벤을 온몸으로 토했다. 병배 선배와 인희 선배는 이십대 끝 자락에 서서 연극판 위로 몸을 불태우다 저녁 무렵이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건너 편 옷을 하는 수경 누나는 내게 발터 벤야민과 장 보드리야르를 알려 주었고, 유병철 연출 선생은 그곳에서 내게 연극을 가르쳤다. 기찻길 건너 마트 사장은 배가 고파 라면을 훔치던 내게 삼양라면 한 박스를 주었다. 월 십사만 원에 계약한 골방으로 돌아와 누우면 머리와 발 끝이 벽에 닿았다. 이불 끝에 매달린 폴 오스터 작가의 달의 궁전은 내용과는 무관하게 그 작은 도시를 브루클린으로 만들었다. 굶주림과 상실에 도취된 채 나는 그렇게 이십 대를 시작했다.

경아 누나는 맥심 커피를 보리차 물처럼 묽게 타 내게 먹이며, 도라지 담배를 건넨다. 볼레로 곡 틈새로 밤이 찾아온다. 나는 이제 밥 짓는 냄새 풍기는 골목 지나 산 중턱에 걸린 극단 연습실로 달려간다. 그렇게 나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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