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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월 00일을 기록

욕망의 삶


삶을 사는 법, 이랄까. 사실 삶을 산다는 것은 이 법칙을 세워 지켜 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시간을 갉아먹으며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 시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버티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얻는 것. 그게 우리가 산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연옥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천국의 풍경 속에 규율과 법칙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무정부주의, 무법칙, 무절제. 규율과 법칙의 존재는 생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공동환상이다.(따라서 천국 세계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다면 이를 위한 환상법칙이 존재할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전제가 배제된 사후세계라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아마 그 세계는 욕망의 향연으로 가득찬 세계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채소류에서만 단백질과 영양분을 섭취한 인간보다 육류를 섭취한 인간의 노화가 빠르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일수록 맛이 좋다. 그래서일까. 인간이 오랜 시간 사육한 돼지와 소의 살코기는 맛있다. 그리고 한국에선 애완동물로 키우는 개고기를 먹는다. 사실 개고기를 먹기 시작한 기원은 중국에서 출발한다. 중국의 한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불이 난 가정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개 한마리가 불에 타 죽었다. 그런데 죽은 개의 살코기 냄새가 너무 자극적이어서 그만 그 집의 아이가 그 살점을 뜯어 먹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 뒤 '개맛'을 보고 만 것이다.

도취된 욕망은 절제를 필요로 한다. 관념이 고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서로에 대한 약속이 최소한의 욕망을 구속하기 위한 족쇄이다. 그래서 욕망은 터부(taboo)의 다른 이름이다. 금기시되는 것. 그게 필요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모든 인류가 동일한 욕망을 해소할 수 없다. 한 곳에 놓인 사과 하나를 배고픈 열 사람이 모두 먹을 수 없다. 이들 각자에겐 굶주림을 해소해야만 한다. 다른 먹거리를 찾을 방법이 없다. 오직 이 사과 하나 뿐이다. 균등하게 나누기엔 모두에게 부족한 양이다. 그렇다면 누가 차지하는가. 애당초 이 세계에선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제약과 조건이 따른다. 집단의 형성, 특정한 위치(계급), 재화를 교환하고 종교가 생겨난 원초적 이유, 그 속엔 욕망이 있다.

이 지구를 사는 인류는 탄생에서부터 욕망이라는 바이러스 숙주를 몸에 지닌 채 살아가야만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것을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실현해야만 한다. 결국 우리 각자에게 남은 시간은, 욕망의 시간이다.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버티며 살아갈 수 있나. 이 순간에도 우리는 각자 타들어가는 촛불처럼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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