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00월 00일을 기록

가정假定에 의한 과거 조각


가정假定에 의한 과거 조각 - 거짓말

1

나는 한동안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했다. 사람이 아닌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살아있지 않은 무생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너무 관심이 없어서 관심이 있는 척해야만 했다. 나는 범주를 따지지 않고 있는대로 읽거나 경험했다. 내가 무얼 관심을 가지고 무얼 잘하고 무얼 사랑할 수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서로 다른 범주들을 연결 짓는 걸 '좋아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십 대의 중반을 넘어서기까지 난 계속 상황이 닿는대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 다녔고 서로 성격과 환경, 상황이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몇몇의 내 성격과 행동을 특정하고 어떤 사람인지를 행동해야 했다. 가까이 있는 누군가 혹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인물들을 흉내냈다. 그렇게 몇몇의 캐릭터들을 늘려 나갔다. 내 속에 쌓인 인물들은 늘 관계맺기를 가지는 상황 속에서 대기 중이었다.

2
진희는, 내가 중학생 무렵 새어머니라고 불러야 했던 사람이 데려 온 코카스파니엘 종의 암컷 강아지였다. 그 때 갓 생후 몇 개월 되지 않은 조그만 녀석이 침대 위를 구르르 뒹굴던 모습을 난 기억한다. 여리고 작고 보호해야 할 대상. 시끄럽진 않지만 끊임없이 집 안을 휘젖고 다니는 말괄량이.

나는 집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좀처럼 그 녀석을 마주할 일이 없었다. 달포에 나눠 집엘 들리던 어느 순간 진희가 부쩍 커졌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한국의 도로는 좁은데 비해 많은 차들이 오다니기 때문에 동물들이 차에 치일 위험이 크다. 진희는 특히 앞 뒤 보지 않고 내달리기 때문에 혹여라도 줄을 풀고 달리게 놔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3
인간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이 지구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강자의 논리로 세운 지구의 룰은 그래서 서로 뜻이 통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아간다. 땅과 해저 깊숙이 파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 화성으로 탐사선을 끊임 없이 쏘아 올려야만 하는 이유 모두 두려움 때문이다. 아는 것 바깥의 공백은 두려움의 몫이다.

4
유기동물들이 모인 2층 주택을 개조한 보호시설에는 온갖 동물들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음울한 표정들, 표정이라니. 동물에게도 표정이 있다. 경매장에 팔려가는 소도 자신의 처지를 알아채고 눈물을 흘린다. 익숙한 것에게 인간은 가차없다. 과잉된 감정은 소모성 배터리의 방전과 그 효과가 동일하다. 혹은, 그 반대로 쇼크상태, 빈사상태와 닮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건 어떠한 관계나 상황에서였건 간에 유기된 동물들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소외된 존재들이었다는 점이다. 사고가 나서 보기에 좋지 않아서 혹은 갑작스런 기타 등등의 사유로 버려졌거나 보신탕, 영양탕 재료로 던져지기 위해 그 어떤 예도 거치지 않은 살육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구원되었거나.

5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할 수 밖에 없었나. 다시 기억해야만 한다.   


 
 

'00월 00일을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벼워지는 시간  (0) 2012.03.25
BROKEN HEART  (0) 2012.02.24
렌즈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  (0) 2012.02.24
발렌타인 데이  (1) 2012.02.15
QUANTEZ  (0) 201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