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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월 00일을 기록

소세지를 닮은 시간

 

몇 일 전, 집에서 홀로 삭발을 했다. 제대로 깎이지 않은 부분들이 괴이한 실벌레처럼 비죽거렸다. 짧지 않은 머리칼이 이내 바닥에 널부러졌고 나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지난 몇 해 전에도 몇 차례 삭발을 했었다. 보기에 나쁘지 않아 시도한 삭발이었는데, 이젠 나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흉물스럽고 괴이한 꼴이다.' 나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데에 놀랐다. 아니, 솔직한 감상에 대해 놀랐달까. 

왜 나는 삭발을 했는가. 생각해보면 딱히 분명한 단서가 나 스스로도 제공되지 않는다. 어쩌면 잊고 있던 부토舞踏 에 대한 상을 심정민의 지난 무용평론 그리고 프랑스에서 개인 작업을 해내고 있는 한 친구를 통해 다시 떠올리게 된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순전히 형이상학적 세계로 나아가길 바란 내 욕망이었거나 혹은, 자해적 충동을 머리카락 스윽 밀어내는 것으로 해소하였는지도 모른다. 또는 어린 갓난아기로(신체적 회귀) 돌아가고픈 욕망이었거나.

살은 점점 부풀어 올라 곧 80kg에 육박하게 된다. 키에 비례한다면 지금 충분한 비만 상태이다.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결핍과 반성, 분노와 절제 사이에서 매일 차곡차곡 살을 충분히 키우고 삭발을 했다. 나는 지금 충분히 먹기 좋은 소세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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