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이었다.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앞에서 그를 만났다. 내 손에는 일회용 도시락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우린 도시락을 편의점에서 함께 먹었다. 난 좀 더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도시락을 비우자마자 자리를 떠났다. 그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번호조차 확인되지 않은 버스엘 올라탄 나는 종로 어디쯤엔가 목적지 없이 내려 버렸다. 갑작스레 차가워진 날씨 탓이었는지 거리가 조용했다. 나는 그렇게 발이 닿는대로 정처없이 걷다가 무게감 있는 조명에 빛을 발하는 목조 구조물이 보였다. 처음엔 조선시대 기념관 즈음이라도 되는가 싶어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는데 알고보니 사찰 입구였다. 그 옆에는 영문으로 큼지막하게 TEMPLE STAY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잔디들 틈새로 바닥조명이 하늘을 향해 노란 불빛을 점점이 쏘아 올리고 있었고, 그 뒤로 제법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건물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조계사 그러니까 대한불교조계종의 본점과 같은 곳이었다.
성인 남자 서넛이 올라가도 부족할만큼 거대한 부처상들이 놓인 절 내부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었는데 한쪽 벽면과 천장엔 죽은 이들의 이름이 걸린 붉은 연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저기 걸린 이름들과 나 사이의 관계는 서글프다, 고 생각했다. 영원히 닿지 않는 세계 저편에서 이름만이 겨우 그들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니까. 어쩌면 나와 당신의 관계가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다 헤어진 이름들을 붉은 연등 아래 하나씩 걸어 놓고선 일년에 한 차례씩 천도를 지내야 하는 것이다. 늘 현재는 아쉽고, 과거는 미려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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