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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shic Record

내 머리카락과의 시간

 

결혼한 한 이성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돌도 지내지 않은 한 아이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얘길 하는 종종 그 친구가 아기 머리를 좌우로 돌려 누이길래 왜 그러는지 물었다. “, 이렇게 해야 아기머리가 예뻐지거든. 한창 어릴 때엔 애들 뼈가 무르니까 이렇게 만져주는 거야.” 내 머리가 양 옆으로 짱구인 이유는 우리 어머니가 어릴 적 나를 그냥 눕혔기 때문일까. 과학적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어 뭐라 더 얘기하진 않았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중, 고교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중학 시절, 나와 내 친구들은 단발령에 처해진 백성들처럼 복장검사를 할 적마다 학생주임과 작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머리카락이 귀 밑을 내려서지 않아야 하고 앞머리는 눈썹을 가리지 않아야 했다. 정해진 복장에서 이탈해서도 안 되었다. 바지를 줄이거나 늘려도 안 되고 넥타이도 제대로 갖춰야만 했다. 저항하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반항심이나 탈선 때문이 아니라 저들끼리 똑 닮은 모양이기 싫었던 탓이 컸다. 도대체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멋을 부리거나 다른 사람과 다른 것 자체가 교칙위반이라니. 학교에서 다양성은 존중하라고 가르치는데 왜 학생의 다양성은 존중하지 않았던 것인지. 치장하고 가꾸느라 학업에 충실하지 못할 거라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는 좋은 옷을 살 수 없는 아이들과 비교가 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스스로 조금씩 변화시키며 꾸미고 다니는 건 온전히 불량학생의 몫이었다. 아무튼 나도 그대로 있기 싫었다.

당시엔 가위춤을 추던 가수 유승준이 인기여서 학교에서도 유승준의 머리를 따라 삭발을 하는 친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규정상 위반은 아니어서 학생주임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옆 짱구 머리인데다 길게 뻗은 생머리였던 탓에 학교 규정대로 머릴 자르니 영락없는 버섯이었다. 어쩌면 지금에야 또 귀엽게 봐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땐 비디오가게에서 본 19세 관람불가였던 비트의 정우성처럼 길게 머리를 내려 다니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생각도 못할 일이어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 그러면 유승준처럼 머릴 아예 밀어버리자! 하지만 결심한 당일부터 삭발금지령이 내려지고 말았다. 불량서클 친구들이 곧잘 머릴 밀기 다니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나는 별 다른 방법 없이 바보 같은 머리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가서도 여전히 내 머리카락은 학교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 한 친구가 내게 초록색 젤리 같은 것을 가져왔다. , 이거 봐. 손에 이렇게 묻혀 머리카락을 세우는 거야. 헤어 젤이었다. 그 뒤로 내 방엔 늘 젤이 있었다. 하지만 젤을 바를 때마다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 끝에 끈적하게 묻어난 젤을 처리하기 위해선 비누칠을 여러 차례 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게다 왠지 모르게 그 특유의 인위적인 모양새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들 하는 것 따르면서도 내심 뭔가 늘 불만이었고 다른 방법이 있을 것만 같았다. 어설프게 멋을 내려던 난 머리를 어찌 해 볼 수 없어 그만 아뿔싸, 내가 쓰던 안경을 푸른 색 렌즈로 교체해버리고 말았다. - 지난 날, 그 충격적인 졸업앨범은 지금 내게 없다. 가능하면 죄다 찾아 불태우고 싶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용케 탈색까지 해선 회색머리를 시도했는데 일주일도 채 버티지 못했다. 정작 회색이 되자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버스 정류장이라던가 길을 가다 내게 핀잔을 주어 머쓱해지기도 했다. 그 뒤엔 왁스도 생겨 젤에서 왁스로 갈아탔다. 마치 486 컴퓨터에서 586 컴퓨터로 교체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펌이란 펌 종류는 죄다 시도해보고 염색이란 염색은 죄다 시도했다. 군에 가서는 한창 반삭머리였고 제대 후엔 몇 해 간 장발 머리를 했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내 머리카락은 제 자릴 잡지 못했다. 내 머리카락을, 내 옆짱구 머리를, 나는 아직 어찌 해야 할 지 감이 오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