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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shic Record

시작된 곳을 찾는 시간

내가 처음 산 옷은 반항적인 눈이 새겨진 Bad Boy 맨투맨 스웨터였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경상남도 울산시에 살고 있었다. 딱히 옷을 살 곳이 다양하진 않았던 그곳에서 소위 멋 좀 부린다는 친구들은 강변 앞 대로 사이에 박힌 작은 지하상가를 찾곤 했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과 함께 양 쪽으로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선 그 곳을 찾았다. 우리는 Bad Boy 맨투맨 스웨터를 샀다. 카세트플레이어는 마이마이보단 소니가 훌륭했고 8음보단 24화음이 더 좋았다. 딱히 왜 좋은지 생각해보기보단 주변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쓸려갔다. 그러던 어느 주말엔가 친구를 만나러 밖을 나섰는데 거리에 Bad Boy의 부릅뜬 눈들이 넘쳐났다. 그 순간 부끄럽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관통해 온 거리를 헤맸다. (사실 Bad Boy 1981년에 런칭한 어패럴 브랜드로 국내에서 판매되었던 제품들을 소위 말하는 짝퉁이었다. 공식 사이트 주소는 여기, www.badboybrands.com)

나는 같은 모양새, 비슷하고 흔한 걸 떠나 억지를 부려 멋을 내는 듯한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뭘 어찌 해야 할 지 몰랐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경상권 최대의 패션시장인 부산 광복동을 찾았다. 이미 여러 차례 광복동 골목을 찾은 경험이 있던 내 동창 친구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시장골목을 누비며 옷을 고르고 흥정을 했다. 그때 우리가 아는 것은 보세옷 정도였다. 동대문 여기저기서 날라 온 옷들을 두고 때론 일본에서 수입한 거라 고집부리며 강매하던 옷가게 형들과 시비가 붙기도 했다. 누군가는 유명브랜드의 레플리카라며 같은 공장에서 만든 옷이라 속여 팔려고도 했다. 옷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지 아는 바가 없던 우리는 그렇다 하면 그런 줄 아는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보세가게라는 것이 여기서 여기였고 거기가 거기였다. 특별한 흥미가 생기질 않았다. 이 즈음 되면 뭔가 그럴싸한 사건이랄까. 그러니까 우연히 찾아 온 패션의 신이 찾아오기라도 할 텐데, 아쉽게도 이렇게 나와 옷과의 관계는 서로 낯선 거리를 유지한 채 찔러 보기만 해올 뿐이었다.

이십 대 초반 무렵, 나는 대학을 갔고 하고 싶은 일을 쫓아 달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군대에 와있었다. 제대 후 한 기업에서 운영하는 쥬얼리브랜드에서 일을 했다. 비교적 편안하게 옷을 입을 수 있어 여기저기 가게들을 찾아 다녔지만 소위 보세의류 말고는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그때가 2007년 즈음이었다. 한창 군에 있을 적 보았던 남성 패션잡지 등에 소개되는 몇몇의 국내디자이너 브랜드가 있긴 했으나 지방 한 구석에서 일을 하던 난 서울까지 찾아가 옷을 살 정도로 성실한 사람은 되질 못했다. 아무튼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옷들은 대체로 뻔해 보였고 그렇다고 보세 옷을 사는 것도 싫었다. 그런 와중에 일본 캐주얼 브랜드 ICOM, EXHIBITIONIST, CherryPepper 등을 수입해 판매하는 글래머 캣(Glamour Cat)이라는 샵이 생겼다. 일종의 일본 캐주얼 브랜드 편집매장인 셈이었다. 당시 글래머 캣에 푹 빠져 (매니저 여직원에게도) 대부분의 옷을 그곳에서 샀는데 구입했던 옷들의 원단 질감도 훌륭했고 전반적인 디테일 등이 지금 생각해도 즐겁게 즐길 만한 옷들이었다.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퍼(fur)가 달린 롱셔츠, 넥타이 같은 끈이 연결된 타탄체크 무늬의 기장이 짧은 셔츠, 그 당시 보기 힘들었던 슬림한 다운자켓 또는 원단에 적절한 데미지를 준 후드 등 모두 매력적이었다. 모두 조금씩 일상의 한 부분씩을 냉소적으로 비틀어 놓은 기분이었다. 예정했던 계획들과 뚜렷하지 않은 미래에 갇혀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내게 자유를 선물하는 듯했다. 가을이 지났고 혼다 바이크를 구매했다. 그 여행길에서 가방 속에 구겨 넣은 글래머캣 매장에서 구매한 옷들은 내게 묘한 힘을 실어 주었다. 7번 국도를 넘어서 목적 없이 달렸던 그 여행길이 나를 서서히 패션의 한 구석으로 끌어 당기고 있을 줄은 그땐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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