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지션이 거의 매거진 에디터로 확ㅈ박선우, 김혜란이 서로 릴레이로 장난 삼아 쓴 텍스트이다.
* 되는대로(생각나는대로) 막 쓸 것을 약속하지 않지 않지 않도록 했다.
* 글은 귀찮아서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기재했다.
* 2011년 4월 29일, 김혜란이 마지막으로 쓴 글을 박선우가 이메일을 통해 받았으나, 같은 해 10월 6일에 글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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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너)와 너(나)는 보편적 집단관계 속에서의 개별적 특수성을 극단적으로 거부하지 않고서는 상호보완도, 소통도 존재할 수 없었다. 결국 벤다이어그램 속 교집합은 의미를 상실했다. 보편성을 상실한 존재의 폭력의 방향은 타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향했다. 자신을 향한 폭력은 정당한가.
#1 P의 시선
고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고기였다. 하지만 명사 그대로 우린 고기를 고기라 생각할 순 없었다. 그는 분명 (여자 혹은 남자인지 정확하진 않지만)인간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인간이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존재에 대해 한낱 고기 한 조각에 치부했다. 그는 그의 이름 그대로 고기 같은 사람이었다. 행동이 없고 최소한의 이동만이 있었다. 이미 살아있는 무언가에서 잘려 나가 오직 다른 무언가에 의해 섭취 당하는 것 말고는 스스로 더 이상 어떤 기능할 수 있는 인간이 도저히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는 유일한 특별함이 있었다. 그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그것은 매우 당연한 상황이었다. 불판에 뒤집히는 고기는 자신이 먹히지 않으려고 결코 발버둥치는 법이 없다. 섭취, 그저 일방적으로 소비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 머리가 잘리고 심장과 쓸개 등 쓸모 없는 덩어리들이 뜯겨 나간 뒤 먹기 좋게 다져진 고기에 다다랐을 때, 그것은 정해진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미펄떡이는심장과뜨끈한뇌가뼈와근육과지방속에머물던것은과거의일. 고기,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름다움은 마치 육질이 알맞게 오른 먹기 좋게 조리될수있는신선한고기라는 것을 알리는 냄새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단지 식욕이 아닌 성욕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다.
#2 S의 시선
"나는 고기입니다."
그가 나에게 무심코 던지던 마지막 목소리가 생각난다.
나는 그를 잘 안다.(이것은 오로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나는 그동안 그가 지니고 있던 어떤 '끌림'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를 스토킹 해 왔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른다.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나의 장기프로젝트. 특히 그의 전화목소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전화를 걸 때 들리는 필링 소리는 꽤나 유혹적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가 얄밉다. 적어도 필링소리 정도는 따르릉따르릉 거려야 내가 그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텐데. 그의 필링소리 때문에 그에 대한 나의 분석과 관찰은 콩깍지 씌인 연인들의 연애편지마냥 주관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은 너무 안타까운 사실이다.)
그의 목소리는 한마디로 '목소리'다. 여자인지, 혹은 남자인지. 나이가 들었는지, 혹은 어린 아이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목소리. 가끔 그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인 듯한 착각 마저 들 정도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아우르는 목소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낼 능력이 없는 목소리. 아니, 어쩌면 그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높아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지라 그의 목소리를 그저 '목소리'로밖에 인식할 수 없었던 것 일지도 모른다.
평소 나는 언제 어디서든 '하얀 종이'만 보면 종이의 내용이 몹시도 궁금하다 못해 견딜 수가 없어 나도 모르는 순간 확성기 같은 목소리로 "목소리다!"라고 외치는 버릇이 있다. (그다지 좋지 않은 버릇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젠 아니다.)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이 이상한 버릇 때문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길을 걷다 검은 휴지통과 검은 뚜껑 사이로 삐져나와있는 하얀종이를 보았고, 나는 잽싸게 그 종이를 잡아 '목소리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종이의 내용을 보았다. 약간의 비린내와 비둘기의 깃털냄새가 났다. 종이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 "나는 고기입니다." _01034603745
난데없이 고기라니. 나는 자신을 고기라 말하는 이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고기의 의미 또한 너무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고기가 아닐까? 아니면, 어떤 사이코패스가 이 사람을 자신의 저녁식사로 삼으려고 세뇌를 시키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단지 이 사람의 별명이 고기인걸까?'
순간 또 "목소리다!"가 나올 것 같아 힘겹게 목구멍 속의 '그것'을 집어삼키고, 나는 백 미터 앞에 보이는 검정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하얀종이에 적혀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것이 나와 그와의 첫 대면을 위한 시작이었다.
#3 P의 시선
고기는 오늘도 어김없이 커피숍에 앉아 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질 않는다. 대체로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늘 커피숍에 있다.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커피가 도착하면 자신은 몸을 가장 불편한 자세로 꼬아 아무것도 하질 않고 그대로 꿈쩍 않고 있는다. (때론, 빨간 빨대가 있을 때에는 마시지만 대체로 그곳의 커피숍은 파란 빨대이다.)
흔한 동양인의 피부, 검은 단발의 곱슬진 머리칼. 그는 어릴 때부터 눈썹이 자라지 않았던 것일까. 눈썹 없는 그의 얼굴은 너무도 미묘했다. 작품이 마무리 되려던 찰나, 그 마지막 순간에 결국 아무것도 해주질 못하고 방치된 그림처럼. 그의 얼굴은 너무나 미묘했다. 그는 색이 바랜 진초록의 군용 밀리터리 야상에 검정색 레깅스를 입고 검정색 힐을 신고 있다. 늘 같은 옷이다. 그는 정작 자각하지 못하지만 여자라 생각되면 여자이고, 남자라 생각되면 남자인 그런 미묘한 밸런스로.
오늘도 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혹은 못하고) 있다. 파란 빨대이다. 예의 그 미묘한 자세로 저렇게 자세를 비틀어 앉아 있을 뿐이다.(사실 앉아있다고 말하기도 곤란한 자세이다.) 다만,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자세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상, 어제와 오늘을 구분 짓는 건 단 하나. 그건 그가 커피숍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적이 없다. 그건 마치 행위예술과도 같은 늬앙스마저 있지만 결국 그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않는다. 오늘도 그렇게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런데,
그가 휴대전화를 받는다, 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처음에 댕, 댕, 댕, 하고 울리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입을 아아, 하고 벌린다. 그 순간 그를 둘러싼 공기가 바뀐다. 반쯤 열린 그의 입은 한 동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 말해, 어서 하라고, 얼른, 이런 식으로 커피숍에 앉은 모두가 눈빛을 쏘았다. 궁금한 것이다, 모두가.
"나는 고기입니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4 S의 시선
" 프리지아 꽃향기를 맡으며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을 들으여 노스텔지어 손수건을 냠냠쩝쩝 게맛살의 마지막은 맛이 좋아 저는 그만 눈물 한 방울 콰와와아아아아아아아앙슈우우우우우우웅푸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덩."
그의 필링소리가 나의 심금을 울린다. 가슴 한 켠의 손수건 한 쪽을 들어 내 볼에 내린 눈물을 훔친다. 그의 눈물소리인 듯한 필링소리가 멈추고, 잠시 후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고기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일상적임과 차분함에 나도 모르는 사이,
"고기.. 잘지냈니?"
라고 말해버렸다.
"나는 고기입니다."
"응, 근데 너 지금 어디니?"
"나는 고기입니다."
고기는 고기라는 말 밖에 하질 못했다.
하지만 그와 통화하는 동안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장장 세 시간 동안 재미있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잘기억이 나질 않지만 중요한 건 그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나오는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의 향수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알았어. 그럼 또 통화하자."
수화기를 내리고 나는 재빠르게 위치추적 비슷한 것을 하여 고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솔직히 나는 위치추적을 할 줄 몰랐다. 그걸 어떻게 그리 했는지 나도 지금은 모르겠다.)
나는 곧, 'RB커피숍'의 오른쪽 모서리의 맨 끝의 두 번째 테이블에 묘한 자세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이것은 나의 직감이었다. 게다가 RB커피숍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나는 한눈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발견한 즉시 그만 '풉!'하고 웃어버렸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자세가 너무나도 미묘하여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아방가르드함과 키치스러움에 그만의 문화를 순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무지함 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만약 이것이 정말 나의 무지함의 결과라면 유일하게 들었던 그의 목소리인 '나는 고기입니다.'도 어쩌면 사실 다른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혹은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통신상 중앙 컴퓨터와 원격지 입출력 장치간의 데이터 교환이 오류가 나서 그만 그의 언어가 비밀번호 같은 표현으로 전달이 된 게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본다. (이 추측은 오랜 이후 부분적으로 사실인 게 드러나게 되지만 그때의 난 몰랐었다.)
#6 P의 시선
고기가 전화를 했다. 그의 입에서 비록 짧지만 완성된 문장이 흘러나온 것은 사 년 전, 그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을 잘못 보고 지나려는 할머니를 붙잡고선 "조심하지 않지 않을 수 없지 않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정말 낮은, 그러니까 말하지 않고 입을 겨우 아슬아슬하게 씰룩거리는 수준의 언어로서 채 완성되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 정도뿐이었기에 나는 (휴대폰이 있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는 고기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통화 상대에게 하더니 대략 세 시간 동안이나 통화를 했다. 그는 그 뒤로 "다니입기고 는나." "고기나는 입다니." "입는 기다니고나." 따위의 말을 간간이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난 후 그 미묘한 포즈로 돌아갔다. 사실 전화를 하는 것도 굉장히 애매해서 얼핏 보기에 그건 전화를 하는 게 아니라 허공에 떨어지려는 휴지를 날려 보낸 뒤 다시 붙잡는 식의 미묘한 동작이었다.
그는 다시 테이블 앞에 어정쩡하고 기묘한 예의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사람들은 한 동안 저들끼리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내 무관심 속에 묻혀 버렸고 그는 그가 하는 일을(?) 다시 방해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를 다시 십 여 분 정도 있었을까, 갑자기 한 여자아이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누군가를 정신없이 찾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그 작은 꼬마숙녀가 찾는 이는 대상이 분명하고 그 여자아이는 이곳에서 그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기이하고도 운명적인 순간임을 나는 알아챌 수 밖에 없었다. 이 작은 커피숍 안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나와 그 꼬마와 고기 사이에 일어난다, 라고 나는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여자아이가 고기를 보자 '풉', 하고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고 고기는 그녀의 반응에 마치 아슬아슬한 도미노가 무너지듯 몸이 의자와 함께 바닥에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평소의 움직임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여성스럽고 지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바뀌더니 사뭇 부끄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는 고기입니다."
"목소리다!"
여자아이, 가 아니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저 여자아이가 갑자기 변화가 생겼다. 분명 작고 조그만 여자아이였는데 그사이 성숙한 이십 대 후반의 여자로 변한 것이다. 그게 내가 처음부터 잘못 본 것인지 아니면 고기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 변화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고기는 그녀의 변화나 나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하게 빠른 걸음으로 커피숍을 빠져 나간다. 나와 그 꼬마는 그를 쫓아갔지만 그 날은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7 S의 시선
그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이상한 고기다.
그것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워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라 그냥 다 집어치우고 나의 관찰무기(카메라,캠코더,망원경,수첩)들을 꺼내 님들께 당장 보여주고 싶을 지경이다.그래서 나는 그의 자세를 도저히 영상으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소 생각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던 나는 언제나 나의 관찰무기들을 꼭 들고다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략 한시간동안 조용히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얼마나 숨을 죽이고 관찰했는지 그때의 내 심장은 아마도 멈추어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의 미묘한 행동들을 지금 말해주고싶지만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는 언어의 표현방식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너무나도 답답하다. 그래서 이 모든설명들을 곧 영상으로 대체하여 보여줄 수 있도록 하겠다.
생각해보니 나는 대략 한시간동안 그를 몰래 관찰하면서 그의 눈빛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입술과 몸짓에 너무 집중을 한것일까. 그의 눈빛은 잘 생각이 안난다.
그의 입술은 5도정도 밑으로 향해 있어서 조금은 슬퍼보이거나 쓸쓸해보인다. 그리고 촉촉하지도 않고, 메마르지도 않아서 확실하게 그의 입술에 립글로즈를 발라주어 '촉촉한 입술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어지는 입술이다. 게다가 어떻게 보면 조그만듯해 보이고 어떻게보면 또 큰 것같은 입술이라 밥을 숟가락에 한탑 쌓아서 먹여본 후 정확하게 크다,작다를 측정해보고 싶은 입술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고기가 있는 4시방향의 테이블 밑에서 몰래 그를 관찰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런 적극적인 관찰방식은 삼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내 나의 결심은 깨지고 말았다. 고기가 하얀 종이와 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목소리다!"
어쩔 수 없이 확성기같은 내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이 부분은 휴대 확성기를 들고 외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주었으면 좋겠다.) 모든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그래도 아랑 곳 하지않고 나는 그가 흰 종이에 쓰고있는 글이 너무나도 궁금해 참을 수가 없어 무작정 테이블 밑에서 빠져나와 그의 테이블 앞에 마주보고 섰다.(이때 나는 내가 입고있던 빨간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의 정체를 모를 것이다. 너무 다행이다.) 그러자 그의 흐느적거리던 움직임이갑짜기 다급한 움직임으로 바뀌더니, 그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RB커피숍 밖을 나섰다. 너무나 갑짝스런 일이라 나는 그가 적고 있었던 하얀종이를 움켜쥐고 그를 쫒아가려 했지만 장시간 쭈그려 앉아있던 터라 관절의 상태도 좋지 않았고, 나의 관찰무기들 때문에 몸이 무거워 날렵한 그의 뒤를 끝까지 쫒을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고 트와일라이트의 시간이 왔다.
고기는 내일 아침일찍 일어나 찾아보기로 하고, 나는 그가 남긴 종이를 펼쳐보았다.
' 빨강과 파랑 사이에서 너의 머리카락은 매일매일 자랍니다.'
#8 P의 시선
나는 갑작스레 그리 되었다, 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글을 시작해본다. 나는 고기를 놓친 저녁, 붉은 망토를 두른 꼬마(아니, 이제는 더 이상 꼬마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의 뒤를 밟는다. 내가 갑자기 그녀를 관찰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기가 쓰여 지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관찰일기를 쓰는 관찰자의 숙명인 것이다. 내일 고기를 다시 찾기 전까지 나는 그녀를 관찰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한 동안 커피숍 인근을 죄다 뒤지며 그를 찾으러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이제 막 그를 관찰하게 된 그녀가 그를 손쉽게 찾을 리 만무했다. 아니 잠깐, 관찰이라니. 그녀도 그럼 나와 같은 관찰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다시 RB 커피숍으로 돌아간다. 계산대 앞에서 망설임 없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그녀는 푸른 빨대가 꽂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가방 속에서 짐들을 하나 둘 꺼내놓기 시작한다. 망원경, 캠고더, 노트류 따위의 물건들이 보인다. 그녀는 한동안 이것들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위치를 바꾸기 시작한다. 왼쪽에서부터 카메라, 망원경, 수첩, 캠코더, 휴대폰, 모나미 볼펜. 다른 물건이 가방 안에 더 있을 법한데 더는 꺼내질 않는다. 그 다음엔 다시 왼쪽에서부터 망원경, 카메라, 수첩, 모나미 볼펜, 캠코더, 휴대폰. 다시 왼쪽에서부터 수첩, 모나미 볼펜, 망원경, 카메라, 캠코더.(이번에는 휴대폰이 다시 가방에 들어가버렸다!) 그 다음 한차례 더 위치를 바꾸려 하지만 캠코더를 손에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테이블 위에 모든 물건들을 가방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 동작들은 마치 인형들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의 손장난 비슷한 것이어서 귀엽다, 라고 내 개인적인 소감을 얘기해본다. 그녀는 결국 파란 빨대에 입조차 대지 않고는 그대로 출입구 바깥으로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이동을 하려는 찰나, 그녀는 발길을 멈춘다. 그리고 내가 마주보는 출입구 오른 편에 그녀는 한참동안 시선을 놓지 않고 있다. 그녀의 손끝이 벽에 닿는다.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거린다. 떨리는 그녀의 손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양 손을 벽에 가져다 대고 문지르기 시작한다. 얼굴이 벽에 닿는다. 다리와 배도 얼굴과 손을 뒤따라 벽에 접촉하기 시작한다. 저 모습은 마치 콘크리트 벽으로 몸을 밀어넣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알겠다. 그녀도 나와 같은 관찰자이다. 지금 저 동작은 3인칭 관찰자 시점 중에서도 가장 상위 등급인 전지적 작가 시점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주인공이 정해진 이상 그녀는 지금 관찰자 시점을 선택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저 동작이 전지적 작가 시점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어느새, 그녀의 손을 시작으로 벽 속에 몸을 서서히 밀어 넣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마치 마그리트의 벽 속으로 들어가는 군인처럼 기이하다. 드디어 몸을 벽 속으로 온전히 집어넣은 그녀는 얼굴만 몰래 빼끔 내민 채로 미소를 짓고 있다. 몰래 내민 눈동자가 귀엽고 섹시하게 번뜩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행동이 없는 그녀를 두고 어찌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도 그녀처럼 고기를 기다라기 위해 도로 건너 편 건물 벽 속으로 가볍게 몸을 집어넣는다. 그녀와 나의 눈동자가 순간 마주친 것 같지만 아마 그건 착각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전지적 작가 시점을 이용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해가 떠오르고 다시 지기를 열흘. 그 동안 약간의 비가 내렸고 또 짧은 더위가 찾아왔지만 대체로 미적지근한 날씨를 유지했다. 나는 그 열흘 동안 꼼짝 않고 벽 속에 있었다. 신인 관찰자 붉은 망토 또한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아직은 완전한 관찰자가 되지 못한 단계였는지 간간히 먹을 것을 사러 가거나 화장실을 다녀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중 눈에 띄는 여자가 카페를 찾았다. 그녀는 노란 원피스에 붉은 하이힐을 신고 노란 리본을 머리에 달았다. 뭔가 초등학생 같은 분위기지만 분명 성숙한 여자의 늬앙스를 잃지 않고 있다. 기이한 분위기이다. 궁금한 나머지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하기 위해 벽에서 빠져나와 그녀에게 접근한다. 붉은 망토는 몇 시간 전부터 모습을 보이질 않고 있다.
#9 S의 시선
나는 마치 상사병에 걸린 고독한 소녀인 냥 그를 정처 없이 찾아다녔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를 찾아 해매던 공간 속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애매한 온기와 채취가 느껴짐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를 빨리 찾아내질 못해서 안달이 나 있긴 했지만 한편으론 그의 애매한 온기와 채취를 느끼고 있는 나의 하이퍼리얼리티한 동물적 감각능력에 감탄을 하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난 몇 일을 그렇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동물적 감각능력을 통해 그의 애매한 온기와 채취를 따라다녔다. 나중엔 내가 그를 찾는 건지 그의 애매한 온기와 채취를 극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내 능력에 감동한 나 자신의 만족감을 즐기는 것인지, 그를 찾는 시간은 과정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이 능력을 좀 더 발전시킨다면 액션범죄스릴러영화나 CSI에 나올 법한 어떤 과학적 기술력의 집합체인 아이템들을 영구적, 절대적으로 소유를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설레였다. 나는 곧장 연구에 들어갔다. 그의 애매한 온기와 채취가 있는 적당한 공간을 정한 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온몸의 감각기관에 귀를 기울렸다. 나는 그렇게 불특정한 콘크리트 회색벽에 기대어 멍한 눈뼈막�서 있었다. (이것은 최선인 나만의 연구방식이다.)
열흘이 지났다.그의 애온채(애매한 온기와 채취)가 시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현미경을 렌즈로 장착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세포의 성질을 띄는 먼지 같은 것이 유유자적으로 공기중에 떠도는 모습이었다. 내 눈은 직접적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환경을 무시하고 그 단세포먼지같은 그의 온기와채취덩어리에 촛점을 맞췄다. 동시에 나는 또 다른 온채(온기와채취)가 나와 함께 머물고 있음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그 온체는 예전부터 쭉 나와 함께였던 것 같았다. 그리고 확실하진 않지만 그 온체는 어떤 분명함을 띄고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 분온체(분명한온기와체취)는 너무나도 분명해서 확실하게 이 온체는 이 온체다! 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이것의 성질은 단순한 '보통의 애매함'이 아닌, '보통중의 보통의 애매함'이라 입에내릴 수 없을 정도의 극한의 일상적 애매함의 분명함인 듯 했다. 그 분명함은 과정의 의미가 없는 결론을 위한 분명함라 그 분명함에 대한 얘기를 분명하게 꺼내는 것조차 실례인 듯해서 여기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이 온체를 가진 분의 가치관에 대한 나의 예의라 생각되어 의식적으로 그 분온체를 내 촛점 밖으로 내보내주었다.
그리곤 이내 다시 고기의 애온체에 집중을 했다.
날이저물었다. 그의애온체들은줄지어돌계단으로되어있는작은골목으로내려가기시작했다. 일반적인세포스러운존재들의불규칙적움직임과는달리, 그들은세명씩짝지어4분의3박자왈츠를추듯리듬을타며떠내려가고있었다. 나도Bach의minuet in G majo를계이름으로흥얼거리며함께리듬을맞추었다.
"솔 도레미파솔 도도~ …."
가로등 불뼁�비치는 그의 애온체들은 매우 수상하면서도 아름다웠다.
#10 P의 시선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몸을 흔든다. 좌로 우로 엉덩이, 우로 좌로 어깨를, 위와 아래로 머리를 흔들며 공기를 상상한다. 대기중의 먼지를 상상한다. 나는 먼지 사이로 몸을 백만억 개로 나누어 허공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 카페로 들어서는 그녀의 코와 귀와 입 속으로 후루룩, 몸 속으로 후루룩 들어간다.
P의 시선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고기입니다. 고기는 고기입니다. 나는 오늘 여자입니다. 사실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도 남자도 될 수 있는데 또 아무것도 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변화가 생겼습니다. 변화는 변화입니다. 변화가 무엇인고 생각해보면 사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랗다.
아아아아아, 오늘은 노란 것이다. 노란 색은 노란 것의 노랗지 않은 것도 아닌 노란 것입니다.
나는 생각하지 않아요. 않는다. 않습니다. 않아. 생각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데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물이 바다로 흘러가고 또 하늘로 오르고 또 내려가듯 어딘지 모를 장소로 생각은 흘러갑니다. 내 속은 지구라서 내 생각은 지구의 먼지이거나 입자이거나 바위이거나 호랑이 달팽이 오렌지 개울물 담배연기 파도 사이에 있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검은색이다.
아아아아아, 오늘은 오늘도 어제도 카페에 온다. 왔다. 왔습니다. 갔습니다. 갔다. 갈 것이다. 간다. 갑니다.
나는 고기입니다. 고기가 무릇 고기의 이유를 모르는데 누군가 나를 침범했다. 바이러스 재채귀 한 번이면 될까. 이것은 비밀의 문제 자연스럽지 못한 세계의 신비 속에 재채귀 한 번이면 애취입니다.
어제는 일억오천일백사십이만 년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화가 왔고 나는 전화를 받는다. 나는 고기오아이우오아이아우아이애애야우아아유입니다. 여자가 나타나고 흔들리고 부서지고 무너질까 나는 철저히 세상의 단절된 벽 속에 언어가 파괴된 형태와 같이 살고 있어서 갑작스럽기 때문에 새롭게 나를 숨겨보았습니다. 사실 약간은 흥미롭기도 해서 영영 사라져 버린 기억의 유물로서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변화는 내심 즐거운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 등장합니다.
"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
카운터 앞에서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커피가 나온다. 어김없이. 그래, 결코 다른 커피는 나오지 않지. 내가 주문한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만 나오니까 나는 사실 식상한데 내가 아는 주문은 결국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뿐이지.
자리에 앉아봅니다.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실 웃겨요. 웃긴다. 의자에 앉는 것은 굉장히 웃긴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웃음은 여간 그칠 기색이 없고 나는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를 결국 입에 대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려요. 결국 오늘도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를 마시지 못하겠다. 것이다. 것이었다.
나는 고기입니다.
#11 S의 시선
나는 끊임없이 내려가는 애온체들의 몸짓에 동화되어 며칠 밤낮을 따라가다 문득 생각했다.
'이 애온체들, 고기와 상관없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개체들이 아닐까?'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동안 이 애온체들의 존재에 흠뻑 취해 고기에 대한 생각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고기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고기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내 머리는 고기 주변에 떨어진 먼지 같은 물질에 의해 쓸데없이 포화상태가 되어 꿀돼지의 머리로 변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정확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채, 아주 희미하고 사소한 것들에 얽매여 '고기'라는 지구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지러웠다. 찬찬히 다시 곱씹어 보았다. 나는 왜 고기를 찾고 있는 것인지, 고기에 대한 어떤 것들을 궁금해하고 있었는지, 나는 대체 무엇을 관찰하려 했던 것인지….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RB에 들어섰다. 주저없이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주머니 속에 넣어 온 애온체 한 마리를 꺼내었다. 그것은 꺼내자마자 또 다시 왈츠에 맞춰 율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마치 나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한 행동이었다. 난 이제 무슨 소용이냐 생각하며 그것을 공기 중으로 내보내고 지구를 보며 고기에 대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RB의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바흐의 미뉴에트가 나를 비웃는 듯 장난스럽게 재잘댄다. 기분은 나빴지만 그 소리는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이내 피식, 웃었다.
그때 고기가 들어왔다.
고기가 내 옆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뭔가 아메리카노 같은 액체를 주문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진 모르겠다. 그는 예전과 같이 애온체스러운 자세를 잡으며 자세를 잡지 않고 재잘대지 않으며 재잘대고 있다.
고기가 나에게 다가오려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예전 그 날처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흰 종이를 꺼내어 무엇을 쓰는 듯 했지만 난 억지로 확성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의 테이블 위엔 오직 아메리카노 한잔이 있을 뿐이었다. 난 나의 관찰방식에 대해 재정립을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기가 다가왔다.
고기가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가왔다. 그는 뭔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난 지금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고기에게 할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메리카노 같은 옷을 입고 아메리카노를 맡으며 장시간 앉아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에 공기 중으로 보내주었던 애온체가 내 어깨 뒤로 조용히 따라오고 있다.
'총총총…, 총총총…, 총총총…,'
바흐의 미뉴에트도 그 뒤를 우아하게 따라온다.
* 되는대로(생각나는대로) 막 쓸 것을 약속하지 않지 않지 않도록 했다.
* 글은 귀찮아서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기재했다.
* 2011년 4월 29일, 김혜란이 마지막으로 쓴 글을 박선우가 이메일을 통해 받았으나, 같은 해 10월 6일에 글을 읽는다.
#0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너)와 너(나)는 보편적 집단관계 속에서의 개별적 특수성을 극단적으로 거부하지 않고서는 상호보완도, 소통도 존재할 수 없었다. 결국 벤다이어그램 속 교집합은 의미를 상실했다. 보편성을 상실한 존재의 폭력의 방향은 타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향했다. 자신을 향한 폭력은 정당한가.
#1 P의 시선
고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고기였다. 하지만 명사 그대로 우린 고기를 고기라 생각할 순 없었다. 그는 분명 (여자 혹은 남자인지 정확하진 않지만)인간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인간이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존재에 대해 한낱 고기 한 조각에 치부했다. 그는 그의 이름 그대로 고기 같은 사람이었다. 행동이 없고 최소한의 이동만이 있었다. 이미 살아있는 무언가에서 잘려 나가 오직 다른 무언가에 의해 섭취 당하는 것 말고는 스스로 더 이상 어떤 기능할 수 있는 인간이 도저히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는 유일한 특별함이 있었다. 그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그것은 매우 당연한 상황이었다. 불판에 뒤집히는 고기는 자신이 먹히지 않으려고 결코 발버둥치는 법이 없다. 섭취, 그저 일방적으로 소비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 머리가 잘리고 심장과 쓸개 등 쓸모 없는 덩어리들이 뜯겨 나간 뒤 먹기 좋게 다져진 고기에 다다랐을 때, 그것은 정해진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미펄떡이는심장과뜨끈한뇌가뼈와근육과지방속에머물던것은과거의일. 고기,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름다움은 마치 육질이 알맞게 오른 먹기 좋게 조리될수있는신선한고기라는 것을 알리는 냄새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단지 식욕이 아닌 성욕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다.
#2 S의 시선
"나는 고기입니다."
그가 나에게 무심코 던지던 마지막 목소리가 생각난다.
나는 그를 잘 안다.(이것은 오로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나는 그동안 그가 지니고 있던 어떤 '끌림'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를 스토킹 해 왔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른다.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나의 장기프로젝트. 특히 그의 전화목소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전화를 걸 때 들리는 필링 소리는 꽤나 유혹적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가 얄밉다. 적어도 필링소리 정도는 따르릉따르릉 거려야 내가 그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텐데. 그의 필링소리 때문에 그에 대한 나의 분석과 관찰은 콩깍지 씌인 연인들의 연애편지마냥 주관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은 너무 안타까운 사실이다.)
그의 목소리는 한마디로 '목소리'다. 여자인지, 혹은 남자인지. 나이가 들었는지, 혹은 어린 아이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목소리. 가끔 그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인 듯한 착각 마저 들 정도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아우르는 목소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낼 능력이 없는 목소리. 아니, 어쩌면 그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높아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지라 그의 목소리를 그저 '목소리'로밖에 인식할 수 없었던 것 일지도 모른다.
평소 나는 언제 어디서든 '하얀 종이'만 보면 종이의 내용이 몹시도 궁금하다 못해 견딜 수가 없어 나도 모르는 순간 확성기 같은 목소리로 "목소리다!"라고 외치는 버릇이 있다. (그다지 좋지 않은 버릇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젠 아니다.)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이 이상한 버릇 때문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길을 걷다 검은 휴지통과 검은 뚜껑 사이로 삐져나와있는 하얀종이를 보았고, 나는 잽싸게 그 종이를 잡아 '목소리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종이의 내용을 보았다. 약간의 비린내와 비둘기의 깃털냄새가 났다. 종이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 "나는 고기입니다." _01034603745
난데없이 고기라니. 나는 자신을 고기라 말하는 이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고기의 의미 또한 너무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고기가 아닐까? 아니면, 어떤 사이코패스가 이 사람을 자신의 저녁식사로 삼으려고 세뇌를 시키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단지 이 사람의 별명이 고기인걸까?'
순간 또 "목소리다!"가 나올 것 같아 힘겹게 목구멍 속의 '그것'을 집어삼키고, 나는 백 미터 앞에 보이는 검정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하얀종이에 적혀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것이 나와 그와의 첫 대면을 위한 시작이었다.
#3 P의 시선
고기는 오늘도 어김없이 커피숍에 앉아 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질 않는다. 대체로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늘 커피숍에 있다.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커피가 도착하면 자신은 몸을 가장 불편한 자세로 꼬아 아무것도 하질 않고 그대로 꿈쩍 않고 있는다. (때론, 빨간 빨대가 있을 때에는 마시지만 대체로 그곳의 커피숍은 파란 빨대이다.)
흔한 동양인의 피부, 검은 단발의 곱슬진 머리칼. 그는 어릴 때부터 눈썹이 자라지 않았던 것일까. 눈썹 없는 그의 얼굴은 너무도 미묘했다. 작품이 마무리 되려던 찰나, 그 마지막 순간에 결국 아무것도 해주질 못하고 방치된 그림처럼. 그의 얼굴은 너무나 미묘했다. 그는 색이 바랜 진초록의 군용 밀리터리 야상에 검정색 레깅스를 입고 검정색 힐을 신고 있다. 늘 같은 옷이다. 그는 정작 자각하지 못하지만 여자라 생각되면 여자이고, 남자라 생각되면 남자인 그런 미묘한 밸런스로.
오늘도 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혹은 못하고) 있다. 파란 빨대이다. 예의 그 미묘한 자세로 저렇게 자세를 비틀어 앉아 있을 뿐이다.(사실 앉아있다고 말하기도 곤란한 자세이다.) 다만,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자세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상, 어제와 오늘을 구분 짓는 건 단 하나. 그건 그가 커피숍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적이 없다. 그건 마치 행위예술과도 같은 늬앙스마저 있지만 결국 그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않는다. 오늘도 그렇게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런데,
그가 휴대전화를 받는다, 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처음에 댕, 댕, 댕, 하고 울리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입을 아아, 하고 벌린다. 그 순간 그를 둘러싼 공기가 바뀐다. 반쯤 열린 그의 입은 한 동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 말해, 어서 하라고, 얼른, 이런 식으로 커피숍에 앉은 모두가 눈빛을 쏘았다. 궁금한 것이다, 모두가.
"나는 고기입니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4 S의 시선
" 프리지아 꽃향기를 맡으며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을 들으여 노스텔지어 손수건을 냠냠쩝쩝 게맛살의 마지막은 맛이 좋아 저는 그만 눈물 한 방울 콰와와아아아아아아아앙슈우우우우우우웅푸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덩."
그의 필링소리가 나의 심금을 울린다. 가슴 한 켠의 손수건 한 쪽을 들어 내 볼에 내린 눈물을 훔친다. 그의 눈물소리인 듯한 필링소리가 멈추고, 잠시 후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고기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일상적임과 차분함에 나도 모르는 사이,
"고기.. 잘지냈니?"
라고 말해버렸다.
"나는 고기입니다."
"응, 근데 너 지금 어디니?"
"나는 고기입니다."
고기는 고기라는 말 밖에 하질 못했다.
하지만 그와 통화하는 동안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장장 세 시간 동안 재미있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잘기억이 나질 않지만 중요한 건 그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나오는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의 향수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알았어. 그럼 또 통화하자."
수화기를 내리고 나는 재빠르게 위치추적 비슷한 것을 하여 고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솔직히 나는 위치추적을 할 줄 몰랐다. 그걸 어떻게 그리 했는지 나도 지금은 모르겠다.)
나는 곧, 'RB커피숍'의 오른쪽 모서리의 맨 끝의 두 번째 테이블에 묘한 자세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이것은 나의 직감이었다. 게다가 RB커피숍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나는 한눈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발견한 즉시 그만 '풉!'하고 웃어버렸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자세가 너무나도 미묘하여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아방가르드함과 키치스러움에 그만의 문화를 순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무지함 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만약 이것이 정말 나의 무지함의 결과라면 유일하게 들었던 그의 목소리인 '나는 고기입니다.'도 어쩌면 사실 다른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혹은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통신상 중앙 컴퓨터와 원격지 입출력 장치간의 데이터 교환이 오류가 나서 그만 그의 언어가 비밀번호 같은 표현으로 전달이 된 게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본다. (이 추측은 오랜 이후 부분적으로 사실인 게 드러나게 되지만 그때의 난 몰랐었다.)
#6 P의 시선
고기가 전화를 했다. 그의 입에서 비록 짧지만 완성된 문장이 흘러나온 것은 사 년 전, 그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을 잘못 보고 지나려는 할머니를 붙잡고선 "조심하지 않지 않을 수 없지 않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정말 낮은, 그러니까 말하지 않고 입을 겨우 아슬아슬하게 씰룩거리는 수준의 언어로서 채 완성되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 정도뿐이었기에 나는 (휴대폰이 있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는 고기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통화 상대에게 하더니 대략 세 시간 동안이나 통화를 했다. 그는 그 뒤로 "다니입기고 는나." "고기나는 입다니." "입는 기다니고나." 따위의 말을 간간이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난 후 그 미묘한 포즈로 돌아갔다. 사실 전화를 하는 것도 굉장히 애매해서 얼핏 보기에 그건 전화를 하는 게 아니라 허공에 떨어지려는 휴지를 날려 보낸 뒤 다시 붙잡는 식의 미묘한 동작이었다.
그는 다시 테이블 앞에 어정쩡하고 기묘한 예의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사람들은 한 동안 저들끼리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내 무관심 속에 묻혀 버렸고 그는 그가 하는 일을(?) 다시 방해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를 다시 십 여 분 정도 있었을까, 갑자기 한 여자아이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누군가를 정신없이 찾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그 작은 꼬마숙녀가 찾는 이는 대상이 분명하고 그 여자아이는 이곳에서 그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기이하고도 운명적인 순간임을 나는 알아챌 수 밖에 없었다. 이 작은 커피숍 안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나와 그 꼬마와 고기 사이에 일어난다, 라고 나는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여자아이가 고기를 보자 '풉', 하고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고 고기는 그녀의 반응에 마치 아슬아슬한 도미노가 무너지듯 몸이 의자와 함께 바닥에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평소의 움직임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여성스럽고 지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바뀌더니 사뭇 부끄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저는 고기입니다."
"목소리다!"
여자아이, 가 아니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저 여자아이가 갑자기 변화가 생겼다. 분명 작고 조그만 여자아이였는데 그사이 성숙한 이십 대 후반의 여자로 변한 것이다. 그게 내가 처음부터 잘못 본 것인지 아니면 고기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 변화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고기는 그녀의 변화나 나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하게 빠른 걸음으로 커피숍을 빠져 나간다. 나와 그 꼬마는 그를 쫓아갔지만 그 날은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7 S의 시선
그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이상한 고기다.
그것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워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라 그냥 다 집어치우고 나의 관찰무기(카메라,캠코더,망원경,수첩)들을 꺼내 님들께 당장 보여주고 싶을 지경이다.그래서 나는 그의 자세를 도저히 영상으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소 생각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던 나는 언제나 나의 관찰무기들을 꼭 들고다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략 한시간동안 조용히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얼마나 숨을 죽이고 관찰했는지 그때의 내 심장은 아마도 멈추어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의 미묘한 행동들을 지금 말해주고싶지만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는 언어의 표현방식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너무나도 답답하다. 그래서 이 모든설명들을 곧 영상으로 대체하여 보여줄 수 있도록 하겠다.
생각해보니 나는 대략 한시간동안 그를 몰래 관찰하면서 그의 눈빛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입술과 몸짓에 너무 집중을 한것일까. 그의 눈빛은 잘 생각이 안난다.
그의 입술은 5도정도 밑으로 향해 있어서 조금은 슬퍼보이거나 쓸쓸해보인다. 그리고 촉촉하지도 않고, 메마르지도 않아서 확실하게 그의 입술에 립글로즈를 발라주어 '촉촉한 입술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어지는 입술이다. 게다가 어떻게 보면 조그만듯해 보이고 어떻게보면 또 큰 것같은 입술이라 밥을 숟가락에 한탑 쌓아서 먹여본 후 정확하게 크다,작다를 측정해보고 싶은 입술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고기가 있는 4시방향의 테이블 밑에서 몰래 그를 관찰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런 적극적인 관찰방식은 삼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내 나의 결심은 깨지고 말았다. 고기가 하얀 종이와 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목소리다!"
어쩔 수 없이 확성기같은 내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이 부분은 휴대 확성기를 들고 외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주었으면 좋겠다.) 모든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그래도 아랑 곳 하지않고 나는 그가 흰 종이에 쓰고있는 글이 너무나도 궁금해 참을 수가 없어 무작정 테이블 밑에서 빠져나와 그의 테이블 앞에 마주보고 섰다.(이때 나는 내가 입고있던 빨간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의 정체를 모를 것이다. 너무 다행이다.) 그러자 그의 흐느적거리던 움직임이갑짜기 다급한 움직임으로 바뀌더니, 그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RB커피숍 밖을 나섰다. 너무나 갑짝스런 일이라 나는 그가 적고 있었던 하얀종이를 움켜쥐고 그를 쫒아가려 했지만 장시간 쭈그려 앉아있던 터라 관절의 상태도 좋지 않았고, 나의 관찰무기들 때문에 몸이 무거워 날렵한 그의 뒤를 끝까지 쫒을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고 트와일라이트의 시간이 왔다.
고기는 내일 아침일찍 일어나 찾아보기로 하고, 나는 그가 남긴 종이를 펼쳐보았다.
' 빨강과 파랑 사이에서 너의 머리카락은 매일매일 자랍니다.'
#8 P의 시선
나는 갑작스레 그리 되었다, 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글을 시작해본다. 나는 고기를 놓친 저녁, 붉은 망토를 두른 꼬마(아니, 이제는 더 이상 꼬마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의 뒤를 밟는다. 내가 갑자기 그녀를 관찰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기가 쓰여 지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관찰일기를 쓰는 관찰자의 숙명인 것이다. 내일 고기를 다시 찾기 전까지 나는 그녀를 관찰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한 동안 커피숍 인근을 죄다 뒤지며 그를 찾으러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이제 막 그를 관찰하게 된 그녀가 그를 손쉽게 찾을 리 만무했다. 아니 잠깐, 관찰이라니. 그녀도 그럼 나와 같은 관찰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다시 RB 커피숍으로 돌아간다. 계산대 앞에서 망설임 없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그녀는 푸른 빨대가 꽂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가방 속에서 짐들을 하나 둘 꺼내놓기 시작한다. 망원경, 캠고더, 노트류 따위의 물건들이 보인다. 그녀는 한동안 이것들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위치를 바꾸기 시작한다. 왼쪽에서부터 카메라, 망원경, 수첩, 캠코더, 휴대폰, 모나미 볼펜. 다른 물건이 가방 안에 더 있을 법한데 더는 꺼내질 않는다. 그 다음엔 다시 왼쪽에서부터 망원경, 카메라, 수첩, 모나미 볼펜, 캠코더, 휴대폰. 다시 왼쪽에서부터 수첩, 모나미 볼펜, 망원경, 카메라, 캠코더.(이번에는 휴대폰이 다시 가방에 들어가버렸다!) 그 다음 한차례 더 위치를 바꾸려 하지만 캠코더를 손에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테이블 위에 모든 물건들을 가방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 동작들은 마치 인형들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의 손장난 비슷한 것이어서 귀엽다, 라고 내 개인적인 소감을 얘기해본다. 그녀는 결국 파란 빨대에 입조차 대지 않고는 그대로 출입구 바깥으로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이동을 하려는 찰나, 그녀는 발길을 멈춘다. 그리고 내가 마주보는 출입구 오른 편에 그녀는 한참동안 시선을 놓지 않고 있다. 그녀의 손끝이 벽에 닿는다.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거린다. 떨리는 그녀의 손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양 손을 벽에 가져다 대고 문지르기 시작한다. 얼굴이 벽에 닿는다. 다리와 배도 얼굴과 손을 뒤따라 벽에 접촉하기 시작한다. 저 모습은 마치 콘크리트 벽으로 몸을 밀어넣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알겠다. 그녀도 나와 같은 관찰자이다. 지금 저 동작은 3인칭 관찰자 시점 중에서도 가장 상위 등급인 전지적 작가 시점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주인공이 정해진 이상 그녀는 지금 관찰자 시점을 선택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저 동작이 전지적 작가 시점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어느새, 그녀의 손을 시작으로 벽 속에 몸을 서서히 밀어 넣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마치 마그리트의 벽 속으로 들어가는 군인처럼 기이하다. 드디어 몸을 벽 속으로 온전히 집어넣은 그녀는 얼굴만 몰래 빼끔 내민 채로 미소를 짓고 있다. 몰래 내민 눈동자가 귀엽고 섹시하게 번뜩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행동이 없는 그녀를 두고 어찌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도 그녀처럼 고기를 기다라기 위해 도로 건너 편 건물 벽 속으로 가볍게 몸을 집어넣는다. 그녀와 나의 눈동자가 순간 마주친 것 같지만 아마 그건 착각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전지적 작가 시점을 이용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해가 떠오르고 다시 지기를 열흘. 그 동안 약간의 비가 내렸고 또 짧은 더위가 찾아왔지만 대체로 미적지근한 날씨를 유지했다. 나는 그 열흘 동안 꼼짝 않고 벽 속에 있었다. 신인 관찰자 붉은 망토 또한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아직은 완전한 관찰자가 되지 못한 단계였는지 간간히 먹을 것을 사러 가거나 화장실을 다녀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중 눈에 띄는 여자가 카페를 찾았다. 그녀는 노란 원피스에 붉은 하이힐을 신고 노란 리본을 머리에 달았다. 뭔가 초등학생 같은 분위기지만 분명 성숙한 여자의 늬앙스를 잃지 않고 있다. 기이한 분위기이다. 궁금한 나머지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하기 위해 벽에서 빠져나와 그녀에게 접근한다. 붉은 망토는 몇 시간 전부터 모습을 보이질 않고 있다.
#9 S의 시선
나는 마치 상사병에 걸린 고독한 소녀인 냥 그를 정처 없이 찾아다녔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를 찾아 해매던 공간 속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애매한 온기와 채취가 느껴짐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를 빨리 찾아내질 못해서 안달이 나 있긴 했지만 한편으론 그의 애매한 온기와 채취를 느끼고 있는 나의 하이퍼리얼리티한 동물적 감각능력에 감탄을 하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난 몇 일을 그렇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동물적 감각능력을 통해 그의 애매한 온기와 채취를 따라다녔다. 나중엔 내가 그를 찾는 건지 그의 애매한 온기와 채취를 극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내 능력에 감동한 나 자신의 만족감을 즐기는 것인지, 그를 찾는 시간은 과정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이 능력을 좀 더 발전시킨다면 액션범죄스릴러영화나 CSI에 나올 법한 어떤 과학적 기술력의 집합체인 아이템들을 영구적, 절대적으로 소유를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설레였다. 나는 곧장 연구에 들어갔다. 그의 애매한 온기와 채취가 있는 적당한 공간을 정한 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온몸의 감각기관에 귀를 기울렸다. 나는 그렇게 불특정한 콘크리트 회색벽에 기대어 멍한 눈뼈막�서 있었다. (이것은 최선인 나만의 연구방식이다.)
열흘이 지났다.그의 애온채(애매한 온기와 채취)가 시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현미경을 렌즈로 장착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세포의 성질을 띄는 먼지 같은 것이 유유자적으로 공기중에 떠도는 모습이었다. 내 눈은 직접적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환경을 무시하고 그 단세포먼지같은 그의 온기와채취덩어리에 촛점을 맞췄다. 동시에 나는 또 다른 온채(온기와채취)가 나와 함께 머물고 있음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그 온체는 예전부터 쭉 나와 함께였던 것 같았다. 그리고 확실하진 않지만 그 온체는 어떤 분명함을 띄고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 분온체(분명한온기와체취)는 너무나도 분명해서 확실하게 이 온체는 이 온체다! 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이것의 성질은 단순한 '보통의 애매함'이 아닌, '보통중의 보통의 애매함'이라 입에내릴 수 없을 정도의 극한의 일상적 애매함의 분명함인 듯 했다. 그 분명함은 과정의 의미가 없는 결론을 위한 분명함라 그 분명함에 대한 얘기를 분명하게 꺼내는 것조차 실례인 듯해서 여기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이 온체를 가진 분의 가치관에 대한 나의 예의라 생각되어 의식적으로 그 분온체를 내 촛점 밖으로 내보내주었다.
그리곤 이내 다시 고기의 애온체에 집중을 했다.
날이저물었다. 그의애온체들은줄지어돌계단으로되어있는작은골목으로내려가기시작했다. 일반적인세포스러운존재들의불규칙적움직임과는달리, 그들은세명씩짝지어4분의3박자왈츠를추듯리듬을타며떠내려가고있었다. 나도Bach의minuet in G majo를계이름으로흥얼거리며함께리듬을맞추었다.
"솔 도레미파솔 도도~ …."
가로등 불뼁�비치는 그의 애온체들은 매우 수상하면서도 아름다웠다.
#10 P의 시선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몸을 흔든다. 좌로 우로 엉덩이, 우로 좌로 어깨를, 위와 아래로 머리를 흔들며 공기를 상상한다. 대기중의 먼지를 상상한다. 나는 먼지 사이로 몸을 백만억 개로 나누어 허공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리고 카페로 들어서는 그녀의 코와 귀와 입 속으로 후루룩, 몸 속으로 후루룩 들어간다.
P의 시선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고기입니다. 고기는 고기입니다. 나는 오늘 여자입니다. 사실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도 남자도 될 수 있는데 또 아무것도 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변화가 생겼습니다. 변화는 변화입니다. 변화가 무엇인고 생각해보면 사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랗다.
아아아아아, 오늘은 노란 것이다. 노란 색은 노란 것의 노랗지 않은 것도 아닌 노란 것입니다.
나는 생각하지 않아요. 않는다. 않습니다. 않아. 생각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데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물이 바다로 흘러가고 또 하늘로 오르고 또 내려가듯 어딘지 모를 장소로 생각은 흘러갑니다. 내 속은 지구라서 내 생각은 지구의 먼지이거나 입자이거나 바위이거나 호랑이 달팽이 오렌지 개울물 담배연기 파도 사이에 있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검은색이다.
아아아아아, 오늘은 오늘도 어제도 카페에 온다. 왔다. 왔습니다. 갔습니다. 갔다. 갈 것이다. 간다. 갑니다.
나는 고기입니다. 고기가 무릇 고기의 이유를 모르는데 누군가 나를 침범했다. 바이러스 재채귀 한 번이면 될까. 이것은 비밀의 문제 자연스럽지 못한 세계의 신비 속에 재채귀 한 번이면 애취입니다.
어제는 일억오천일백사십이만 년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화가 왔고 나는 전화를 받는다. 나는 고기오아이우오아이아우아이애애야우아아유입니다. 여자가 나타나고 흔들리고 부서지고 무너질까 나는 철저히 세상의 단절된 벽 속에 언어가 파괴된 형태와 같이 살고 있어서 갑작스럽기 때문에 새롭게 나를 숨겨보았습니다. 사실 약간은 흥미롭기도 해서 영영 사라져 버린 기억의 유물로서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변화는 내심 즐거운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 등장합니다.
"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
카운터 앞에서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커피가 나온다. 어김없이. 그래, 결코 다른 커피는 나오지 않지. 내가 주문한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만 나오니까 나는 사실 식상한데 내가 아는 주문은 결국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뿐이지.
자리에 앉아봅니다.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실 웃겨요. 웃긴다. 의자에 앉는 것은 굉장히 웃긴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웃음은 여간 그칠 기색이 없고 나는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를 결국 입에 대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려요. 결국 오늘도아메아자라지아하나잔주사이으으이으이으으이이응이으이를 마시지 못하겠다. 것이다. 것이었다.
나는 고기입니다.
#11 S의 시선
나는 끊임없이 내려가는 애온체들의 몸짓에 동화되어 며칠 밤낮을 따라가다 문득 생각했다.
'이 애온체들, 고기와 상관없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개체들이 아닐까?'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동안 이 애온체들의 존재에 흠뻑 취해 고기에 대한 생각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 고기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고기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내 머리는 고기 주변에 떨어진 먼지 같은 물질에 의해 쓸데없이 포화상태가 되어 꿀돼지의 머리로 변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정확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채, 아주 희미하고 사소한 것들에 얽매여 '고기'라는 지구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지러웠다. 찬찬히 다시 곱씹어 보았다. 나는 왜 고기를 찾고 있는 것인지, 고기에 대한 어떤 것들을 궁금해하고 있었는지, 나는 대체 무엇을 관찰하려 했던 것인지….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RB에 들어섰다. 주저없이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주머니 속에 넣어 온 애온체 한 마리를 꺼내었다. 그것은 꺼내자마자 또 다시 왈츠에 맞춰 율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마치 나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한 행동이었다. 난 이제 무슨 소용이냐 생각하며 그것을 공기 중으로 내보내고 지구를 보며 고기에 대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RB의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바흐의 미뉴에트가 나를 비웃는 듯 장난스럽게 재잘댄다. 기분은 나빴지만 그 소리는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이내 피식, 웃었다.
그때 고기가 들어왔다.
고기가 내 옆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뭔가 아메리카노 같은 액체를 주문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진 모르겠다. 그는 예전과 같이 애온체스러운 자세를 잡으며 자세를 잡지 않고 재잘대지 않으며 재잘대고 있다.
고기가 나에게 다가오려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예전 그 날처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흰 종이를 꺼내어 무엇을 쓰는 듯 했지만 난 억지로 확성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의 테이블 위엔 오직 아메리카노 한잔이 있을 뿐이었다. 난 나의 관찰방식에 대해 재정립을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기가 다가왔다.
고기가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가왔다. 그는 뭔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난 지금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고기에게 할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메리카노 같은 옷을 입고 아메리카노를 맡으며 장시간 앉아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에 공기 중으로 보내주었던 애온체가 내 어깨 뒤로 조용히 따라오고 있다.
'총총총…, 총총총…, 총총총…,'
바흐의 미뉴에트도 그 뒤를 우아하게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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