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증명한 최초의 패션
내가 옷에 대해 한창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스무 살 무렵, 대학과 함께 극단에서의 연극 활동을 병행하던 때였다. 사실 옷이라기보단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패션디자이너에 관심을 가지거나 좋은 옷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건 스무 살 후반 무렵의 일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다시 들어가자.
극단엔 덥수룩한 긴 머리에 수염을 기른 배우이자 멘토인 20대 후반의 선배가 있었다. 그 마른 몸엔 자주 군복 같은 것들이 걸쳐져 있었는데 극단 연습실 입구에서 담배를 물고 생각에 잠긴(지금 생각해보면 별 생각 하지 않았을) 그 모습은 마치 제도에 대한 반항과 자유의 상징처럼 내게 느껴졌다. 그 즈음엔 내가 한창 일본의 코메디수사극 춤추는 대수사선을 즐겨 시청했는데, 그 드라마에 등장하는 배우 오다 유지가 연기하는 아오시마 형사가 일본의 무거운 제도와 현장을 그 나름의 가벼우면서도 강직한 방식으로 풀어 나가는 방식이 좋았다. 매번 극적인 순간일 때마다 아오시마가 그 커다란 야상을 펄럭이며 달려가는 장면이 계속 눈에 밟혔다.
연극활동과 드라마 그리고 글을 쓰는 수업들 사이에서 자유와 반항,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고 싶단 생각이 쌓이기 시작했다. 헌데 그런 생각을 가진 내가 앞 뒤 간결하고 틀에 박힌 옷을 입는다는 게 너무 싫었다. 우선 나는 웹사이트를 온통 뒤져 아오시마 형사가 입었던 야상을 찾아 다녔다. 꼬박 열흘을 검색한 끝에 일본 옥션의 경매를 통해 옷을 구매해 배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낡은 옷 혹은 낡은 것처럼 보이는 새 옷만 골라 입었다. 머리는 늘 산발이었고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니거나 귀에 걸고 다녔다. 캠퍼스 어디든 편안한 자리가 있으면 다리를 꼬고 누워 잠을 잤고 원리원칙을 무시하는 행동이나 발언들을 서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내가 걸친 야상과 군복 비슷한 것들이 내 몸에 자리잡을 때 나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사람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비록 그것이 트랜드는 아니었으나 내 인생을 증명한 최초의 패션이었다.
몇 일 전, 디자이너 이학림 분이 SNS를 통해 이런 글을 적었다.
참 신기하게도, 옷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입는 걸 봐도 알 수 있지만
디자인하는 걸 보면 더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포켓민지는 포켓민지처럼, 성도찡은
성도찡처럼 디자인을 한다.
매사가 베베 꼬인 놈은 만들어 놓은
것도 지처럼 베베 꼬인 옷만 만들고
천성이 순한 사람은 그런 옷을, 그런
색감을 사용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거꾸로 내가 디자인 한
옷들을 보고 내가 어떤가 생각 해
봤는데........
..... 혼돈 그 자체였다.
질서가 없어 질서가....
Mental disorder......
어쩌면 사람에게 있어 옷은 자신에 대해 참 많은 단서를 드러내는 소리 없는 목소리일 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쓸 때에 옷에 대해 구체적인 묘사를 하는 이유 또한 그러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옷을 얘기하는 건 바로 그 사람의 현재와 과거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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